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인식론: 가짜뉴스와 극우 단톡방 사이에서 살아남기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인식론: 가짜뉴스와 극우 단톡방 사이에서 살아남기

가짜뉴스·극우 단톡방·딥페이크가 넘치는 탈진실(Post-Truth) 시대, 우리는 언제 ‘이건 사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글은 전통 인식론의 ‘정당화된 참된 신념(JTB)’ 개념을 바탕으로 니체·라투르·포스트모더니즘을 재해석하고, 한국 극우 단톡방과 알고리즘, 정보문해력·미디어 리터러시 실천 전략을 엮어낸 인식론적 생존 매뉴얼입니다.

💡 KEY INSIGHT

탈진실은 단순히 ‘거짓말이 많은 시대’가 아니라, 무엇을 안다고 말할 자격을 규정해 주던 정당화의 기준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때 인식론은 철학 교양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신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생존 기술이 됩니다.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인식론이 필요한 이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가족 단톡방에서 정치 얘기만 꺼내지 않으면 평화가 유지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장의 캡처와 3분짜리 유튜브 영상이 올라온 뒤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죠.

“이게 진짜야, 언론은 다 숨기고 있어.”

그 순간, 제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의외로 철학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 무엇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이야기할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인식론입니다.

이 글에서 저는 세 가지를 하나로 엮어 보려 합니다.

  • 탈진실이 단순한 가짜뉴스 범람이 아니라는 점
  • 니체, 포스트모더니즘, 라투르가 탈진실의 공범이 아니라 방패가 될 수 있다는 점
  •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인식론적 생존 습관’은 무엇인지

탈진실(Post-Truth)이란 무엇인가?

탈진실이란 무엇인가? 보통 이렇게 정의합니다.

탈진실(Post-Truth)이란,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말한다.

— Oxford Dictionaries, Word of the Year 2016

2016년, 옥스퍼드 사전은 ‘post-truth’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습니다.1 브렉시트, 트럼프 당선 직후, 영어권에서 ‘post-truth’ 사용 빈도는 전년 대비 수백 퍼센트 급증했습니다. 이 단어는 학술 용어를 넘어 정치·언론 담론의 핵심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2016년 이후 국내 언론에서 ‘탈진실’이라는 표현이 눈에 띄게 많아졌고, 최근에는 12·3 비상계엄 사태, 극우 카카오톡 단톡방, 유튜브 정치 채널, 생성형 AI·딥페이크 문제까지 더해지면서 탈진실은 우리 일상의 공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즘은 거짓말이 너무 많아.”

하지만 탈진실은 단순히 거짓말이 많아진 시대를 뜻하지 않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진실/거짓의 구분 자체가 흐려지는 것입니다.

  • 가짜뉴스라는 말에는 원래 ‘진짜/가짜’ 구분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 그런데 탈진실 환경에서는 이 구분이 점점 의미를 잃습니다.
  •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내가 믿고 싶은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제 경험상, 탈진실의 공기는 이런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 “언론은 다 썩었어, 유튜브가 더 솔직해.”
  • “팩트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우리 편이냐가 중요해.”
  • “진실이 어딨어, 각자 진실이 있는 거지.”

이쯤 되면 문제는 단지 ‘정보’가 부족하다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이는가, 그 기준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인식론(epistemology)으로 넘어갑니다.


전통 인식론: 정당화된 참된 신념과 탈진실 시대의 붕괴

철학에서 ‘지식’은 오랫동안 이렇게 정의되었습니다.

지식 = 정당화된 참된 신념(JTB, Justified True Belief)

— 전통 인식론의 고전적 정의

여기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신념(belief): 내가 그것을 ‘그렇다’고 믿고 있어야 하고,
  2. 진리(truth): 그 믿음이 실제로도 맞아야 하고,
  3. 정당화(justification): 내가 그렇게 믿을 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알고 있다”는 표현에는 사실 이 세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제 비가 왔다”는 걸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 어제 실제로 비가 왔고(진리),
  • 나는 그것을 믿고 있고(신념),
  • 창밖에서 비가 내리는 걸 직접 봤고, 다른 사람들도 증언하고, 뉴스에도 나왔기 때문(정당화)입니다.

1960년대에 겟티어(Edmund Gettier)가 “참된 신념이고 정당화도 된 것 같은데, 그래도 ‘지식’이라고 부르기엔 이상한 사례들”을 제시한 이후 인식론은 세분화되었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의 핵심에는 언제나 정당화(justification)가 있다.

저는 탈진실 시대의 문제를 이렇게 요약하고 싶습니다.

💡 KEY INSIGHT

진리가 사라진 게 아니라, 정당화가 붕괴했다. 이제 많은 사람에게 ‘정당화’는 출처·증거·검증 절차가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그럴듯한가, 내 정체성과 맞는가”로 대체됩니다.

이제 많은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는 그렇게 느껴. 그게 내 진실이야.”
  • “내가 직접 봤어. 유튜브에서.”

여기서 ‘정당화’는 더 이상 출처, 증거, 과정이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그럴듯한가, 내 정체성과 맞는가”로 축소됩니다.

흥미롭게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지식과 정보의 차이가 뭐냐”고 묻는 설문조차 거의 없습니다. 학계에서도 “사람들이 지식/정보/의견을 실제로 어떻게 구분하는가”에 대한 실증 연구는 많지 않습니다.2 그만큼 우리는 지식의 조건을 일상에서 거의 따져보지 않고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잠시 멈춰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최근 3개월 동안, ‘사실이라고 믿고 공유했다가 나중에 정정한 정보’가 얼마나 되나요?

그때 “이건 사실이겠지”라고 판단했던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출처? 다수 의견? 아니면 ‘나와 코드가 맞는 사람’의 말이었나요?

— 당신의 일상 속 인식론 점검

이 질문을 곱씹어 보면, 이미 우리는 탈진실 시대의 인식론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니체, 포스트모더니즘, 라투르와 탈진실 인식론

탈진실 시대를 비판하는 글들에서 자주 나오는 이름이 있습니다. 니체, 포스트모더니즘, 브루노 라투르. 그리고 이런 문장도 빠지지 않습니다.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만 있을 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로 흔히 알려진 문장

이 문장을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봐라, 철학자들이 상대주의를 퍼뜨려서 지금 이 난리가 난 거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크게 틀렸습니다.

니체의 관점주의: ‘각자 진실’이 아니라 관점의 엄격함

니체가 말한 것은 대략 이런 취지에 가깝습니다.

  • 우리는 언제나 어떤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
  • 관점이 없으면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점이 똑같이 좋은 건 아니다.

니체에게 중요한 건, 그 관점이 얼마나 삶을 풍부하게 하고,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관점주의는 “각자 진실이니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아니라, “내 관점이 정말 충분히 깊고 튼튼한가를 끝없이 의심하라”는 요구에 가깝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약한 객관성’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거대 서사와 절대 진리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주장이 똑같이 유효하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이른바 ‘약한 객관성’ 혹은 ‘상호주관성’ 개념을 제안합니다.

  • 완전하고 절대적인 관점은 없지만,
  • 서로 다른 관점들이 비판적으로 대화하며,
  • 더 나은 설명덜 억압적인 해석을 향해 갈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극단적 상대주의와는 전혀 다릅니다.

라투르: 진리의 네트워크와 탈진실의 오용

브루노 라투르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으로 유명합니다. 자연과학조차 순수한 ‘사실’이 아니라 연구자, 실험 장비, 논문 심사, 학계 네트워크가 얽혀 만들어지는 네트워크의 산물이라고 설명했죠.

이 때문에 라투르를 “과학도 다 사회적 구성일 뿐이니, 뭐가 진짜인지는 의미 없다”는 식으로 오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라투르는 오히려 포스트트루스 정치와 자신의 이론의 오용을 공개적으로 우려했습니다.

그는 대략 이런 취지로 말합니다.

“제가 하려던 말은 ‘진실이 없다’가 아니라,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네트워크가 얼마나 복잡하고 취약한지 보자는 것이었다. 그걸 가지고 ‘그러니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쪽으로 가는 건 악몽이다.”

— Bruno Latour가 포스트트루스 정치에 대해 언급하며

또 이렇게 말합니다.

“진리의 다양성을 보호하는 것이 문명이다.”

여기서 다양성은 “각자 맘대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 양식과 지식 체계들이 서로의 기준을 시험하며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니체와 라투르, 포스트모더니즘의 여러 흐름은 탈진실의 공범이 아니라, 오히려 “내 해석만이 진실”이라는 오만과 싸우기 위한 언어를 제공합니다.

이 언어를 이제 카카오톡 단톡방과 유튜브 알고리즘이라는 한국 현실 위에 놓고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극우 단톡방과 알고리즘: 탈진실 인식론이 무너지는 과정

지금까지는 철학 이야기였습니다. 이제는 아주 현실적인 장면으로 내려와 보겠습니다.

극우 단톡방: ‘대안 현실’이 만들어지는 4단계

한국 연구와 심층 기사들을 보면,3 극우 카카오톡 단톡방은 대략 이런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1. 정체성 부여
    “여긴 깨어 있는 애국 시민들만 있는 방입니다.”
    “언론과 정부가 숨기는 진실을 공유합니다.”
    → 방에 들어오는 순간, ‘나 vs 무지한 다수’라는 정체성이 주어집니다.
  2. 음모론 생성
    “이건 다 공산주의 세력의 계획이다.”
    “뒤에는 중국 배후가 있다.”
    각종 캡처, 유튜브 영상, 출처 불명 통계가 쏟아집니다.
    → 사실 검증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틀이 구축됩니다.
  3. 체제 전쟁 프레임
    “이건 단순한 정책 논쟁이 아니다. 체제 전쟁이다.”
    “너는 애국자냐, 반국가 세력이냐.”
    → 모든 사안이 선/악, 애국/반역의 이분법으로 재해석됩니다.
  4. 고립과 대안 현실
    “밖에 나가서 이런 얘기하면 빨갱이 취급당한다.”
    “이제 믿을 건 우리밖에 없어.”
    → 기존 미디어·지인·가족과의 신뢰는 약화되고, 단톡방이 곧 ‘현실’이 됩니다.

한 연구자는 이 구조를 “정체성 부여 – 음모론 – 체제 전쟁 – 고립화”라는 단일 서사로 정리합니다. 인식론의 언어로 다시 쓰면 이렇습니다.

“정당화의 기준이 완전히 감정·정체성 기반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팩트 체크 한 번 해보자”던 사람이,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 “팩트보다 중요한 건 누가 우리 편이냐야.”

여기서 진리(JTB의 T)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의 진리’로 재정의됩니다.

알고리즘, 울림통, 필터 버블

이 구조를 뒷받침하는 것은 디지털 미디어와 알고리즘입니다.

  • 전통 미디어의 게이트키핑은 약화되었고,
  • 유튜브·카카오톡·SNS가 주된 뉴스 유통 경로가 되었습니다.
  • 한국 조사에서도, 카카오톡·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는 응답 비율이 꾸준히 높습니다.

여기에 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편향과 함께 다음 현상이 겹칩니다.

  • 울림통(echo chamber): 비슷한 생각만 서로 증폭되는 공간
  • 필터 버블(filter bubble): 알고리즘이 나에게 맞는 것만 골라주는 환경

이 환경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내 관점만이 진실”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딥페이크와 생성형 AI: ‘봤다/들었다’도 정당화가 안 된다

여기에 최근 몇 년 사이 생성형 AI와 딥페이크까지 더해졌습니다.

국제 기구(EU, UN 등) 보고서들은 선거·정치 캠페인에서 AI 생성 허위 정보와 딥페이크가 심각한 위협이라고 경고합니다. 시각·음성 증거의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습니다.

  • 조작된 정치인 음성, 합성된 폭력 장면, 가짜 기자회견 영상…
  • “내가 직접 봤어, 영상으로”라는 말이 더 이상 충분한 정당화가 되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 상황에 이릅니다.

“봤다/들었다”는 경험 하나만으로는 이제 ‘안다’고 말할 정당화가 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탈진실 시대의 인식론”은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매일의 실질적인 생존 기술과 직결됩니다.


정보 과잉과 새로운 허무주의: 더 많이 알수록 덜 아는 역설

전 세계 데이터 생산량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여러 보고서는 “지난 2년간 생성된 데이터 양이 인류 역사 전체에서 만들어진 데이터의 총량을 능가한다”고까지 말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정보를 개인이 검증할 수 있는가입니다. 행동경제학과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정보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보다 더 우유부단하고, 더 쉽게 단순한 서사에 기대게 됩니다.

철학자 한병철은 현대 사회를 두고 ‘사실화(Faktizität)’와 ‘새로운 허무주의’라는 표현을 씁니다.

  • 모든 것이 사실처럼 보이지만,
  • 사실/거짓의 구분이 실제 삶에서는 점점 의미를 잃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한나 아렌트의 통찰을 더해 볼 수 있습니다.

  • 거짓말과 자기기만조차 사실/거짓의 구분을 전제합니다.
  • “이건 사실이지만, 나는 거짓말을 해야겠다”는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탈진실은 이 기준마저 무너뜨립니다.

  • “팩트가 뭔지는 모르겠고, 어차피 다 조작이야.”
  • “누가 뭐라 해도, 난 그냥 이게 맞다고 느껴.”

이 지점에서 무지는 “몰라서 생긴 빈 공간”이 아니라,

지식과 무지의 경계 자체가 흐려진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때 느껴지는 감정은 단순한 혼란이 아니라, 한병철이 말한 새로운 허무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정말로 무엇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 상태가, 결국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입니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탈진실 조건

지금까지는 비교적 보편적인 탈진실 메커니즘을 봤습니다. 이제 한국적 맥락을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공산주의·종북·중국 배후론이라는 만능 키

한국 극우 담론에서 반복되는 서사는 익숙합니다.

  • “이건 다 공산주의자들의 장기 전략이다.”
  • “뒤에는 중국이 있다.”
  • “이 모든 건 종북 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다.”

이 프레임은 정책, 젠더, 기후, 인권 등 거의 모든 이슈에 덧씌워집니다. 서로 다른 문제들이 하나의 거대 음모 서사로 흡수됩니다.

젠더 갈등과 ‘페미니즘=공산주의’ 서사

젠더 이슈도 예외가 아닙니다.

  • 일부 극단적 공간에서는 “페미니즘 = 공산주의 운동의 일종”이라는 서사가 유통됩니다.
  • PC(정치적 올바름)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단순화하기도 합니다.

이런 논리는 통계나 연구보다 정체성의 언어로 작동합니다.

  • “너는 우리 편 남성이냐, 저쪽 편 페미니스트냐.”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의 ‘애국 vs 반국가’ 이분법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온라인 공간에는 다음과 같은 구도가 빠르게 퍼졌습니다.

  • “진짜 애국자 vs 반국가 세력”
  • “군을 지지하는 애국 시민 vs 나라를 망치는 좌파”

이 모든 것이 사실 논쟁이라기보다 정체성 투쟁으로 작동합니다.

  • “그게 진짜였냐, 아니냐”보다
  • “너는 어느 편이냐”가 더 빨리 물어지는 구조입니다.

이 언어들은 모두 인식론적 역할을 합니다.

“팩트가 어떻든, 너는 애국이냐 아니냐를 선택해야 한다.”

이런 구조는 특정 극우 커뮤니티만의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 진영도 방향만 다를 뿐 비슷한 인식론적 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질문 또한 탈진실 시대의 인식론 질문입니다.


정보문해력과 미디어 리터러시: 실천적 인식론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마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뭘 하면 되지?”

많은 글이 이 지점에서 “팩트 체크 잘하자, 여러 출처 보자” 수준의 조언을 던지고 끝납니다. 분명 필요한 말이지만, 충분하진 않습니다.

정보문해력: 정보·지식·진실을 구분하는 힘

정보문해력(information literacy)은 흔히 이렇게 정의됩니다.

  • 필요한 정보를 찾고,
  • 그 정보를 평가하고,
  •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여기에 저는 한 줄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정보·지식·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인식론적 토대.

대략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정보: 어떤 내용이 “이렇다더라” 수준의 데이터
  • 지식: 그 데이터에 대해 정당화된 참된 신념을 갖게 된 상태
  • 진실: 개인의 믿음과 무관하게, 세계가 실제로 어떤지에 대한 문제

이 셋을 구분할 수 있어야,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이건 그냥 정보일 뿐인데, 내가 너무 빨리 ‘지식’으로 승급시킨 건 아닐까?”

FIND 체크리스트: 시민용 신빙론

인식론 이론 중에는 신빙론(reliabilism), 진리추적 이론이 있습니다. 복잡한 논쟁은 제쳐두고 시민 언어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정보 획득 방법이 대체로 진리에 도달하는 데 신뢰할 만한가?”

한국에서 제안되는 FIND 같은 체크리스트는, 이 이론을 실천적으로 번역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목 설명
F – 출처 확인 (Find the source)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 어디서 나온 건지 먼저 보기
I – 이해관계 파악 (Identify interests) 이 정보로 이익을 볼 사람·집단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기
N – 비교·검증 (Negotiate across sources) 최소한 1~2개의 다른 출처와 교차 확인해 보기
D – 다양한 관점 수용 (Diverse perspectives) 나와 다른 정치·이념 스펙트럼의 해석도 한 번은 읽어 보기
보류 결정 (Decide to suspend) 여전히 불확실하면, “보류”라는 옵션을 인정하기

최근 한국에서도 ‘미디어교육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되며 국가 차원의 미디어·정보 리터러시 지원이 논의되었지만, 정권 변화와 함께 팩트 체크 인프라 축소에 대한 우려도 나옵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도적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단순 ‘팩트 체크 기술’로 보지 않기

마지막으로, 미디어 리터러시를 단순히 “가짜뉴스 잘 골라내는 스킬”로 한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 시민적 덕성,
  • 공론장에 대한 감수성,
  • 서로 다른 관점과의 대화 능력

이 함께 묶여야 합니다. 인식론이 철학 교양을 넘어서, 민주주의 시민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객관성 vs 상대주의: 민주주의를 위한 최소한의 진실

여기서 흔히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탈진실(Post-Truth) 시대에 객관성 같은 게 가능하긴 한가요?”

전통적 의미의 절대 객관성을 되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극단적 상대주의로 갈 수도 없습니다.

  • “모든 관점이 다 똑같이 유효하다.”

이 태도는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여러 연구에서,

  • 기후변화, 선거 결과, 인권 문제 같은 기본 사실에 대한 합의가 무너진 사회일수록
  • 정치적 분열과 폭력이 늘어난다는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최근 정치이론과 인식론에서는 ‘탈중심화된 객관성’, ‘상호주관적 객관성’ 같은 개념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절대 진실까지는 못 가더라도, 서로 다른 관점이 비판적으로 대화하며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사실 집합은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 최소한의 사실 위에서 작동합니다.

  • 선거 결과가 어땠는지,
  • 법이 어떻게 통과되었는지,
  • 기후가 실제로 변하고 있는지,

이런 것에 대한 공동의 사실 인프라가 없다면,

  • 정책 논의는 모두 음모론으로 흘러가고,
  • 카리스마, 돈, 선동 능력이 사실 검증을 대체하게 됩니다.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탈진실은 프리(Pre) 파시즘이다.”

‘애국 vs 반국가’ 이분법, “우리 말고는 다 조작”이라는 음모론,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정치”는 파시즘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과 닮아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사실의 장(場)이다.

이 장을 지키는 일이 바로 탈진실 시대의 인식론이 맡은 역할입니다.


인식론은 교양이 아니라 생존 기술이다

이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제 개인적인 생각을 조금 더 솔직하게 적어보겠습니다.

1) 탈진실은 정보 문제도, 도덕 문제도 아닌 ‘정당화의 붕괴’다

많은 글이 탈진실을 “정치인과 언론이 거짓말을 많이 해서 생긴 문제”로만 설명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 경험상, 탈진실의 핵심은 여기에 가깝습니다.

“나는 언제, 무엇을 안다고 말해도 되는가?”

라는 인식론의 질문이 사회 전체에서 약해진 것입니다.

  • 정보는 넘치고,
  • 각자의 정체성은 강해지고,
  • “나는 이렇게 느껴”가 정당화를 대체하면서,

정당화의 기준 자체가 붕괴되고 있습니다.

2) 철학은 탈진실의 공범이 아니라, 싸우기 위한 언어를 이미 갖고 있다

니체, 포스트모더니즘, 라투르는 종종 탈진실의 책임을 뒤집어쓰곤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진리가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복잡한지,
  •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 했습니다.

한병철은 새로운 허무주의를 경고했고, 아렌트는 사실의 정치(Politics of Truth)가 무너지면 전체주의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이 전통을 잘 읽어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KEY INSIGHT

“철학은 탈진실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탈진실과 싸우기 위한 언어와 습관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3)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인식론적 생존 습관 5가지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견디기 위한 실용적인 인식론 습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느리게 믿기
    충격적인 캡처나 영상을 보면 바로 공유하지 않고 최소 10분은 보류합니다.
    그 사이 출처와 맥락을 한 번 더 확인합니다.
  2. 출처의 구조 보기
    “누가 말했나?”를 넘어, “이 정보가 어떤 경로와 이해관계를 거쳐 내 눈앞에 왔는가”를 상상해 봅니다.
  3. 펠리블리즘(fallibilism) 수용하기
    “나는 지금 이게 최선이라고 믿지만, 틀렸을 가능성을 항상 20%쯤 남겨 둔다”를 기본값으로 둡니다.
    이를 행동으로 연결해 반대 진영의 가장 괜찮은 논자를 일부러 찾아 읽습니다.
  4. 단톡방·커뮤니티를 메타 관찰하기
    같은 내용이 어떻게 증폭되는지,
    어느 순간부터 ‘정체성·감정’ 언어가 팩트보다 앞서는지,
    한 발 떨어져 관찰해 봅니다.
  5. ‘모른다’고 말할 용기 갖기
    주변에서 의견을 요구할 때,
    “아직 잘 모르겠어. 조금 더 지켜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집니다.

저는 인식론을 더 이상 단순한 철학 교양이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탈진실(Post-Truth) 시대에 정신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 기술”에 가깝습니다.


지금 당장 해볼 수 있는 3가지 액션 아이템

마지막으로, 이 글을 덮고 바로 시도해볼 수 있는 세 가지 액션 아이템을 정리합니다.

🎯 ACTION ITEM

1. 오늘부터 뉴스 읽는 순서 바꾸기
1) 제목을 보기 전에, 먼저 출처와 작성자, 날짜를 확인합니다.
2) 하루에 최소 한 번은 내가 평소 잘 보지 않는 매체의 기사를 일부러 클릭해 봅니다.

🎯 ACTION ITEM

2. 단톡방 ‘10분 룰’ 적용하기
1) 충격적인 정치·사회 관련 링크가 올라오면 바로 클릭하지 않습니다.
2) 10분 뒤, 다른 출처에서 같은 내용이 보도되는지 찾아보고 나서 판단합니다.

🎯 ACTION ITEM

3. 일주일에 한 번, ‘상대 진영의 가장 괜찮은 논자’ 읽기
1) 내가 평소 동의하지 않는 진영에서,
2) 가장 합리적이라고 평가받는 필자나 유튜브 채널을 골라,
3) 최소 한 편은 끝까지 읽거나 봅니다.

한 달만 실천해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꽤 달라질 것입니다. 그 변화 자체가, 탈진실 시대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작은 희망입니다.


FAQ: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인식론 Q&A

Q1. ‘탈진실(Post-Truth)’은 단순히 거짓말이 많은 시대를 뜻하나요?
아닙니다. 거짓말이 늘어난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객관적 사실의 중요성이 감정·정체성 정치에 밀려나는 현상, 그리고 사실/거짓 구분 자체가 흐려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가짜뉴스는 ‘진짜/가짜’ 구분 위에 놓인 거짓말이라기보다, 그 구분 자체를 공격하는 ‘사실성 공격’에 가깝습니다.

Q2. 니체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탈진실 시대를 ‘예언’했거나 정당화했다고 볼 수 있나요?
부분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이들은 절대 진리에 대한 비판과 관점의 다양성을 강조했지만, “아무 말이나 다 진실”이라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니체의 관점주의와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은 오히려 더 엄격한 성찰과 검증 구조를 요구합니다. 철학 전통을 “탈진실의 책임자”로 돌리는 건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Q3. 가짜뉴스를 안 믿으려면 ‘팩트 체크’만 잘하면 되지 않나요?
팩트 체크는 필요조건이지만, 결코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정보 과잉과 알고리즘 환경에서 개인이 모든 정보를 직접 검증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정보문해력·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신뢰할 수 있는 언론과 플랫폼 규제, 공공의 팩트 체크 인프라가 함께 작동해야 합니다.

Q4. 극우 단톡방이나 음모론 커뮤니티에 빠지는 사람들은 모두 ‘비이성적’인가요?
그렇게 단순화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확증편향, 소속감 욕구, 불안한 사회경제적 환경, 신뢰할 수 있는 공적 정보 인프라의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인식론적 약점(정당화 기준의 붕괴)과 심리·사회 구조를 함께 다루는 접근이 필요합니다.

Q5. 탈진실 시대에 ‘객관성’은 여전히 가능한가요?
전통적 의미의 절대 객관성은 어렵겠지만, ‘탈중심화된 객관성’ 혹은 ‘상호주관적 객관성’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서로 다른 관점들이 비판적으로 대화하면서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적 사실 집합을 목표로 삼는 방식입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 공동의 사실 위에서만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습니다.

Q6. 일반인이 실천할 수 있는 인식론적 습관에는 무엇이 있나요?
1) 너무 빨리 믿지 않기(판단 지연), 2) 정기적으로 반대 진영의 가장 괜찮은 논자를 읽기, 3) 언제나 출처·맥락·작성자를 함께 보기, 4) ‘나도 틀릴 수 있다’는 펠리블리즘을 마음속 기본값으로 두기, 5) 단톡방·커뮤니티에서 정보가 어떻게 증폭되는지 한 발 떨어져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마무리: ‘알고 있다’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

돌이켜보면, 가족 단톡방에서 시작된 작은 말다툼이 저를 탈진실 시대의 인식론으로 끌고 왔습니다. “가짜뉴스가 문제다”라는 말 뒤에 숨어 있던 진짜 질문은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언제, 무엇을 안다고 말해도 되는가?”

탈진실 시대에 진짜 사라진 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건 안다고 말해도 된다”고 스스로를 멈춰 세우던 마지막 판단력, 즉 인식론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이 글이 그 판단력을 조금이라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글도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는 걸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 다양한 경험과 관점이 더해질 때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상호주관적 객관성’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1 Oxford Dictionaries, Word of the Year 2016: post-truth. 공식 페이지에서 보기
2 김병원,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정보·지식·진실 개념 분석」, 정보관리학회지, 2020. 논문 전문 읽기
3 예: 한국 극우 단톡방과 허위정보를 분석한 경향신문 심층 기사. 관련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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