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밤하늘을 상상해 보세요. 해가 지면 서쪽 하늘에 유난히 밝은 별이 하나 떠오릅니다. 사람들은 그 별을 ‘헤스페루스(Hesperus)’, 저녁별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새벽녘, 동쪽 하늘에는 또 다른 밝은 별이 빛났죠. 이번에는 ‘포스포루스(Phosphorus)’, 새벽별이라 불렀습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이 둘이 완전히 다른 천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천문학이 발전하면서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저녁별과 새벽별은 같은 별이었습니다. 바로 금성이요. 이 발견은 단순한 천문학적 사실을 넘어, 20세기 철학의 가장 중요한 논쟁 중 하나를 촉발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솔 크립키(Saul Kripke)라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샛별은 개밥바라기다”라는 진술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지만, 일단 알게 되면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참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립키가 발견한 후험적 필연성의 핵심입니다.
🧠 200년간 당연했던 상식: 칸트의 세계
이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크립키가 무엇을 뒤엎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1781년,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지식의 종류를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의 구분법은 이후 200년간 철학의 기본 문법이 되었죠.
| 구분 | 선험적 (a priori) | 후험적 (a posteriori) |
|---|---|---|
| 인식 방법 | 경험 없이 이성만으로 | 경험을 통해서만 |
| 필연적 진리 | ✅ 가능 | ❌ 불가능 (당시 상식) |
| 예시 | “총각은 미혼 남성이다” | “물은 섭씨 100도에 끓는다” |
칸트 이후 철학자들은 거의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필연적으로 참인 것은 경험 이전에 알 수 있고, 경험으로 아는 것은 우연적이다. “7+5=12″는 경험 없이도 필연적으로 참이고, “저 고양이는 검다”는 경험으로 알지만 우연적이다. 깔끔하죠?
그런데 1970년, 29세의 젊은 철학자가 프린스턴 대학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 깔끔한 등식에 균열을 냈습니다.
🔍 프린스턴의 젊은 철학자, 상식을 뒤엎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처음 크립키의 논증을 접했을 때 당혹스러웠습니다. “경험으로 알지만 필연적이라고? 말이 되나?” 하지만 그의 논증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크립키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인식론)와 사태가 어떻게 존재하는가(형이상학)는 정말 같은 문제인가?”
다시 금성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고대인들은 저녁별과 새벽별이 다르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금성은 언제나 금성이었습니다. 그들이 몰랐을 뿐이죠.
크립키는 이 간단한 사실에서 혁명적 통찰을 이끌어냈습니다:
- 인식론적 차원: “샛별 = 개밥바라기”는 천문학적 관찰이 필요한 후험적 발견이다.
- 형이상학적 차원: 하지만 일단 그것이 금성이라면, 금성이 자기 자신과 다른 세계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이 동일성은 필연적이다.
이것이 바로 후험적 필연성(a posteriori necessity)입니다.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지만, 모든 가능세계에서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다른 도시에 살았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여전히 ‘여러분’이죠. 이름은 속성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킵니다.

🔑 비밀의 열쇠: 고정지시어
크립키가 이 논증을 펼치기 위해 사용한 핵심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고정지시어(rigid designator)라는 개념입니다.
설명을 위해 두 가지 표현을 비교해 볼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바로 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킵니다. 그가 철학자가 아니었어도, 교사가 아니었어도.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제자”는 다른 가능세계에서 다른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다른 제자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면요.
이제 핵심을 말씀드릴게요. 두 개의 고정지시어가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 동일성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성립합니다.
“헤스페루스”와 “포스포루스”는 둘 다 고정지시어입니다. 둘 다 금성을 가리키죠. 그러므로 “헤스페루스 = 포스포루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입니다. 금성이 자기 자신과 다른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천문학적 관찰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알고 나면, 이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닙니다. 필연적 진리입니다.
🧪 물은 정말 H₂O일 수밖에 없는가
크립키의 논증에서 가장 일상에 가까운 예시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은 H₂O다.”
이 문장이 참이라는 것은 화학 실험을 통해 발견되었습니다. 명백히 후험적 지식이죠. 하지만 크립키는 묻습니다: “물이 H₂O가 아닌 세계가 가능한가?”
여기서 흥미로운 사고실험이 등장합니다.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이 제안한 ‘쌍둥이 지구(Twin Earth)’ 시나리오입니다.
쌍둥이 지구 시나리오:
우리와 똑같아 보이는 행성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투명하고, 마시고, 바다를 채우는 액체가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도 그것을 ‘물’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분자 구조를 분석해 보니… XYZ였습니다.
크립키와 퍼트넘의 답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물이 아닙니다. 물처럼 보이는 다른 물질일 뿐입니다. ‘물’이라는 단어는 고정지시어로서 H₂O라는 특정 물질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관점에서 과학적 발견은 단순히 우연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은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물이 H₂O라는 것은 물의 본질에 대한 발견이며, 따라서 필연적입니다.

🎯 우리 삶 속의 후험적 필연성
철학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시나요? 사실 크립키의 통찰은 우리 일상에서도 작동합니다.
법정에서의 동일성
범죄 용의자가 성형수술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외모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DNA가 일치합니다. 법정은 이 사람이 범인과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합니다.
왜일까요? ‘김철수’라는 이름은 특정 속성(외모, 직업, 거주지)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고정지시어니까요.
AI와 정체성의 물음
더 미래적인 질문도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의식을 완벽하게 디지털로 복제한다면, 그 복제본은 원래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
크립키의 ‘기원의 본질주의’에 따르면, 답은 ‘아니오’입니다. 특정 생물학적 기원에서 태어난 존재만이 그 사람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복제본이라도 다른 존재입니다.
물론 이 결론은 논쟁적입니다. 기능주의자들은 정반대 결론을 내리죠. 하지만 크립키의 분석은 적어도 이 질문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만약 당신이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당신’일까요? 크립키라면 “아니오”라고 답할 것입니다. 기원이 다르면 다른 사람이니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그래도 남는 질문들
솔직히 말씀드리면, 크립키의 논증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비판과 논쟁이 존재합니다.
- 본질의 경계: 테이블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본질적’이라면, 어디까지가 본질이고 어디부터가 우연일까요?
- 직관의 한계: 크립키의 논증 상당 부분이 “우리의 직관”에 호소합니다. 하지만 직관이 틀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반본질주의: 객체지향 존재론 같은 현대 철학은 ‘본질’ 개념 자체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크립키의 업적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200년간 당연시되던 구분을 무너뜨렸고, 우리가 ‘앎’과 ‘존재’를 더 정밀하게 구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자주 묻는 질문
- 후험적 필연성: 경험으로 알지만 모든 가능세계에서 필연적인 진리
- 고정지시어: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표현 (예: 이름)
- 인식론 ≠ 형이상학: ‘어떻게 아는가’와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다른 문제
- 과학적 발견의 재해석: 과학은 우연적 사실이 아닌 본질을 발견한다
📚 더 읽어보기
- 솔 크립키, 《이름과 필연》, 정대현·김영주 역, 필로소픽, 2014
- 정대현, 《솔 크립키》, 커뮤니케이션북스, 2024
- Hilary Putnam, “The Meaning of ‘Meaning'”, 1975
“저녁 하늘의 별과 새벽 하늘의 별이 같은 금성이라는 것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금성은 언제나, 모든 가능한 세계에서,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입니다.”
— 크립키의 후험적 필연성이 우리에게 남긴 통찰